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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茶人)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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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4회 작성일 23-05-08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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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18〉 한국차 신화학 다시쓰기<세계일보>
입력 2011.08.22 (월) 22:35
 
 매월당 김시습의 학문적 바탕은 어릴 적부터 교육받은 주자학의 경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운명적으로 산천의 무위자연을 토대로 하는 노장(老莊)과 그의 외롭고 불우한 삶을 안아준 불교의 선학을 모태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의 현실을 비판할 때는 경학으로 무기를 삼고, 마음을 다스릴 때는 도불(道佛)에 의존했다. 그가 차를 가까이하게 된 것은 삶에서 방외지사의 삶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선승과 매우 가까운 삶을 보냈다. 그가 남긴 시문에서 선승으로는 준상인(峻上人)과 선상인(禪上人), 심은상인(尋隱上人), 민상인(敏上人), 승희도인(昇羲道人), 선상인(仙上人) 등이 등장한다.
<center></center>그가 불도에 심취하게 된 계기도 준상인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8세(1452년)에 송광사에서 모친상을 끝내고 그곳에 주석하고 있는 준상인과 사귀게 된다. 그는 ‘증준상인(贈峻上人)’이라는 20수의 연작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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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집의 서문. 매월당의 문집을 보면 그는 차에 대해 백과사전식 지식을 갖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가 나중에 사귄 심은상인을 산으로 보내면서 쓴 시 5수 가운데 초암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시가 있다. 

“푸른 산 깊은 곳에 띠풀 암자(茅菴) 지으니/ 암자 아랜 맑고 깊은 만길 못/ 가는 곳 되는 대로 구름 따라 흐르고/ 머물 때 한가로이 달과 절집에 동숙하네/ 차 달이는 작은 방 부엌처럼 연기 나고/ 약초 캐는 먼 산에는 구름이 청람으로 자욱하네/ 둘이 아닌 법문을 어찌 알리/ 앞의 삶은 뒤의 삶과 같은 것일세.”

위의 시에서 모암(茅菴)은 바로 초암(草庵)이다. 초암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초가집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히 절집의 암자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초암을 둘러싸는 환경이 바로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절집에서 차는 음료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을 도와주는 물질로 사용된다. 차는 반음반양(半陰半陽)의 물질로 마음을 가라앉혀주고, 청정하게 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현대과학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물질인 테아닌이 차에 들어 있으며 뇌파를 알파파로 바꾸는 것으로 밝혀냈다. 이를 경험적으로 알게 된 선승들은 즐겨 차를 마셨다. 이것이 후에 다선일미로 발전했을 것이다. 매월당은 선승과 가까이하면서 이를 일찍 터득하였다.

“언뜻 보면 맑은 모습 오래된 친구 같은데/ 면목을 사모한 지는 오래되었소/ 절개와 지조는 큰 소나무 곧은 대나무 같고/ 몸가짐은 밝고 높아 한 마리 난새와 학일세/ 참선 의자에서 고요히 창해의 달을 바라보고/ 다천(茶泉)에서 한가로이 푸른 못의 용을 길들이네/ 대사에게 언젠가 도를 물으면/ 내 검은 눈동자에 낀 백태를 긁어주시오.”

위의 시는 낙산사 선상인을 두고 읊은 시이다. 선과 차가 일치가 된 경지를 읽을 수 있다. 매월당과 선상인을 잇는 매개로 차가 등장하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매월당의 다선일미의 경지를 잘 나타내주는 시가 있다.

“오래 앉아 잠 못 들다가/ 마지막 남은 촛불 심지 손으로 잘랐네/ 서릿바람 소리 귀에 쟁쟁하더니/ 어느새 싸락눈 베갯머리에 떨어졌네/ 마음이 물처럼 깨끗하니/ 자유자재하여 막힘과 거리가 없네/ 바로 나와 남을 잊는 것이네/ 혼자서 찻잔에 차를 따라 마시네.”

시인은 마음이 물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표현하더니 마침내 마지막 구절에서 혼자 차를 마시는 행동을 취한다. 혼자 차를 마시는 것이 차의 최고의 경지라고 한다. 깨달음과 차 한 잔 마시는 것을 하나로 통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는 선가(禪家)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다선일미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선가의 일심(一心)은 말을 끊고 생각을 끊은 자리에 있다.

매월당은 칠완다(七椀茶)를 마신다고 했다.

“한가하면 경전 두어 권 읽고/ 목마르면 일곱 사발의 차를 마시네.”

노동(盧仝)의 칠완다는 당시 이미 차인들에게 알려진 듯하다. 노동은 매월당과 여러 면에서 상통함을 앞에서 말했다. 시를 말하고 차시를 말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매월당의 시기에 이미 차와 차 생활은 백과사전적 지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차에 관한 후대의 문헌이 나온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단지 차의 전통이 그동안 망실되었던 것을 찾았을 따름이다. 매월당은 당시 차에 가장 정통하면서도 차를 끔찍이 사랑한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차를 직접 재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차 종류와 차 생활에 대해서도 해박했음을 알 수 있다. 매월당이야말로 차의 근세적 원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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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집에 실린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 매월당은 다산 정약용보다 약 330년 전에 차를 음용하며 차에 대한 시를 여러 수 짓는 등 진정한 차인이었다. 

이를 두고 조선 후기에 일어난, 다산·초의·추사에 의해 이루어진 차의 중흥을 한국 차의 다성(茶聖)이니 다선(茶仙)이니 하는 것은 한국 차의 연대를 하대로 낮추는 일에 불과하다. 아무리 단절된 한국 차사를 정립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졸속과 땜질식으로 하면 누더기가 될 뿐이다. 매월당의 시를 보면 그야말로 전천후 차인, 전인적 차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국의 봄바람 부드럽게 일어나니/ 차 숲의 잎새에는 뾰족한 싹 머금었네./ 가려낸 어린 싹 지극히 신령스러움에 통하고/ 그 맛과 품수는 육우 다경에 실렸다네./ 자순( )은 창과 기 사이에서 따고/ 봉병(鳳餠)과 용단(龍團)은 모양만 본떴다네./ 벽옥(碧玉)의 다구에 차를 넣어 끊이면/ 게눈거품 일며 솔바람소리 들리고/ 산사의 고요한 밤에 손님들이 둘러앉아/ 운유(雲?)한 모금 마시니 두 눈이 맑아지네./ 당가(黨家)에서 얕게 짐작하는 저 조악한 사람이/ 어찌 설다(雪茶)의 그 맑음을 알리요.”(雀舌)

이른 봄에 따는 새순은 신령과 통하고, 자순은 기창(旗槍) 사이에서 따는 것을 알고 있다. 또 거품 이는 모양의 해안(蟹眼)과 물 끓는 소리의 송풍(松風), 운유차(雲?茶)까지 꿰뚫고 있다. 당가(黨家)의 고사까지 알고 있다. 실로 매월당의 다학에 관한 박식함이나 조예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는 비록 차의 재배와 법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없는 편이 도리어 그의 차세계의 정신적 깊이를 추측케 한다. 차는 결국 마음이 아닌가.

“솔바람 불어 차 달이는 연기 몰아/ 하늘하늘 흩날리며 시냇가에 떨어지네/ 동창에 달 떠도 잠 못 이루고/ 차병을 들고 돌아가 차디찬 샘물 긷네/ 이상하게 태어나면서부터 세속을 싫어했고/ 인생 초입에 봉(鳳)으로 불렸으나 이미 젊음은 다했다네/ 차 끓일 때 누런 잎을 그대는 아는가/ 다만 시를 쓰다가 숨어 삶이 누설될까 두렵다네.”(煮茶)

매월당의 ‘차를 달이며’의 구절이다. 그가 얼마나 차 마니아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그의 운명을 차와 함께하고 있다. 어느덧 차가 그의 운명이 되어버렸다.

매월당은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나고, 주위로부터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정작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젊음이 오기도 전에 젊음을 다하고 마치 누런 찻잎처럼 되어버렸다. 그나마 숨어서 시를 쓰다가 이마저 탈로 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매월당은 그의 시 ‘천형(天形)’에서 “이 때문에 하늘을 공경하면 경 또한 성실할 것이고, 하늘을 예로서 받들면 예도 허망하지 않을 것이다.”(以此敬天敬亦誠矣, 以此禮天禮非妄矣)라고 하였다.

매월당은 천지간에 통하지 않은 곳이 없고, 인간이 이룩한 유불선에 관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가 차를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차(茶)의 도(道)’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초암에서 가장 큰 우주를 자유자재하는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초암차의 연원은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매월당의 차 정신은 재야의 사림(士林)으로 계승되어 남인들에 의해 꽃을 피운다. 남인들은 권력경쟁에서 노론들에 밀려난 뒤 자연스럽게 낙향하여 초야에 묻히거나 제자를 기르는 일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았고, 차를 접하게 되었다. 남인의 대표적인 가문이 윤선도의 해남윤씨 가문이다. 다산은 해남윤씨 가문의 외손이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생존연대는 약 330년 차이가 난다. 그런데 전인적 차 생활을 한 점, 자연친화적 삶을 영위한 점, 그리고 민중의 삶을 걱정하는 모습이 너무나 닮아 있다. 방외인의 방랑생활을 한 매월당, 오랜 유배생활을 한 다산은 차를 기르고 차를 즐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선비정신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급조된 차사(茶史)와 차 문화의 복원, 그리고 날조된 차인의 계보는 도리어 전통을 훼손하고 심하면 국적 없는 차 문화가 되게 할 위험마저 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시장논리에 의해 차 문화를 잘못 이끌어 가다 보면 생활 속의 건전한 차 문화 육성에서 빗나갈 수도 있다.

차문화’를 펴낸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과)는 그동안 다산이 초의에게서 차를 배웠다는 설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다산이 초의에게서 차를 배운 것으로 쓴 글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은 그 반대입니다. 심지어 다산이 아암 혜장에게서 차를 배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산은 귀양 오기 전에 차에 대한 식견이 높았습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차를 찾은 것은 특히 소화불량 때문이었습니다. 1805년 우연히 만덕산 백련사로 놀러 갔다가 야생차를 발견하고, 아암 혜장 등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아암 혜장과 그 제자가 다산이 일러준 제법에 따라 차를 만들어 다산께 드립니다. 차가 떨어지면 다산은 ‘걸명소’를 보내 차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식이었어요. 이후 다산의 제다법은 보림사와 대둔사의 승려들에게까지 퍼져나갑니다. 이는 이규경의 ‘도차변증설(?茶辨證說)’, 이유원이 쓴 장시 ‘죽로차’와 ‘임하필기’ 중의 ‘호남사종’ 등 여러 기록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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