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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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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7회 작성일 23-05-0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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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줄기차게 흩뿌리는 삼월

선방에서 병든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대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

다른 중들이 거양할까 두렵군.’



매월당 김시습이 1493년(성종 24년) 봄에 쓴 ‘무량사에 병들어 누워(無量寺臥病)’라는 제목의 시다. 김시습은 이 시를 쓴 얼마 뒤 부여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조선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김시습은 이렇게 시대를 마감했다.

 

58세 되던 1492년, 관동을 떠돌던 김시습이 왜 무량사로 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이곳에서 다른 세상으로 갔고 시신을 화장했으며 승탑(부도·충남유형문화재 25호)과 그가 스스로 그렸다는 자화상(보물 제1497호)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무량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매월당의 정신과 사상을 현실에서 느끼고 체화할 수 있는 훈련장이자 역사의 무대이다. 지난 4월2일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가 무량사에서 발족한 것도 이러한 상징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등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교를 취했다. <십현담요해> 등 불교 관련 많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해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2,200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그는 놀고 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를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한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되었다. 실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이며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이다. 1435년(세종 17년)에 서울 성균관 북쪽 반궁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일성(一省), 모친은 울진 장씨였다. 부모가 언제 나고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김시습은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6세손인 김주원의 22대손이다. 신라와 고려 때 명신과 석학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러나 김시습의 조부와 부친은 하급 무반직에 머물렀다. 그나마 조부는 오위부장(오늘날로 치면 연대장 정도의 직위)을 지냈으나 아버지 일성은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음보(蔭補)를 통해 충순위(5위 가운데 충무위에 딸렸던 군대)의 하급직에 봉해졌을 뿐이다.

 

김시습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공자가 환생한 인물’이라고까지 여겨졌다. “매월당이 날 때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가 반궁리 김일성의 집에서 나는 것을 꿈꾸었다. 이튿날 그 집에 가서 물어보니 매월당이 태어났다고 하였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세에 김시습을 칭송하다보니 나온 탄생설화로 보인다. 그의 이름 ‘시습’은 논어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이다. 이웃에 살던 학자 최치운이 지어주었다. 최치운은 세종 때 집현전에 들어갔고 다섯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이조의 참판과 좌승지를 역임했다. 그러나 5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시습은 여섯 살이었다. 만약 최치운이 더 오래 살면서 관직에 머물렀다면 김시습의 앞날에 힘이 되어 주었을 지 모를 일이다.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다. 그가 쓴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서 스스로 그렇게 썼다. 그의 천재성에 주목한 외할아버지는 김시습에게 우리말보다 ‘천자문’을 먼저 가르쳤다. <당현송현시초(唐賢宋賢詩抄)에서 100여 수를 가려 뽑아 읽게 했다. 김시습은 50세 무렵에 지은 시 ‘동봉 여섯 노래’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이렇게 썼다.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갓난아기 아끼시어

내 옹알이 소리 듣고 기뻐하셨네.

걸음마 배우고 나니 글공부 가르치셔

내가 지은 시편들이 꽤나 고왔지.

세종대왕 들으시고 궁궐로 부르사

큰 붓 한 번 휘두르니 용이 날아올랐다네.’



김시습은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 유모인 개화가 보리를 맷돌에 갈고 있는 것을 보고 지은 시가 전한다. ‘비도 안 오는데 천둥 소리 어디서 나지. 누런 구름이 풀풀 사방으로 흩어지네.’ 그의 소문을 듣고 다섯 살 때 정승 허조가 찾아왔다. 허조는 김시습을 만나자마자 “늙을 노(老)자로 시구를 지어보거라”라고 말했다. 김시습은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라고 읊었다. 세종대왕이 승정원 승지를 시켜 김시습을 시험하고 칭찬하면서 비단을 내린 것은 아홉 살 전후한 시기이다. 세종대왕은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내가 친히 인견(引見)하고 싶지만 관례에 없던 일이어서 사람들이 듣고 놀랄까봐 두렵다. 집으로 돌려보내어 그 아이의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지극히 정성스레 가르쳐서 키우도록 하라. 성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뒤에 크게 쓰고자 하노라.’



다섯 살 때부터 열세 살에 이르기까지 김시습은 이웃에 살던 대사성 김반으로부터 <논어> <맹자> <시경> <춘추> 등을 배웠다. 겸사성 윤반으로부터는 <주역> <예기> 등을 배웠다. 이 시기에 김시습은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 각종 역사서와 제자백가서 등을 스스로 공부했다.

김시습이 열다섯 살 되던 해인 1449년 어머니가 별세하였다. 외할머니는 그를 강릉 부근 시골로 데려가 3년 시묘살이를 시킨다. 하지만 시묘살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일성은 몸이 약해 집안일을 꾸려나가기 위해 후처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계모는 김시습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김시습은 “부친이 계모를 얻으셔서 세상사가 어그러지고 각박해졌다”라고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 썼다. 모친과 외할머니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깊은 그늘을 남겼다. 그가 지은 시문에 ‘아버지’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불교를 접한 데는 이러한 심적 고통이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18세 때 전남 송광사로 가 설준 대사를 만나 불법을 배운다. 송광사에 머물다 서울로 돌아온 김시습은 정3품 벼슬인 훈련원 도정이었던 남효례의 딸을 맞아 첫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부부 생활이 오래 갔던 것 같지는 않다. 언제 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부인 남씨에 대한 이야기는 김시습이 남긴 시문 어디에도 없다. 이후 행적을 보아도 그가 부인 남씨와 같이했던 기간은 1년이 채 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후사도 없었다.

 

37세로 왕위에 오른 문종이 병약하여 2년 4개월만에 승하하고 1452년 5월18일 12세의 단종이 즉위했다. 이듬해 봄에 있었던 과거에서 김시습은 낙방하고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서책을 싸들고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그 해 10월10일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등을 강화도 교동에 유배 보낸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1455년 6월 수양대군의 위협을 견디다 못한 단종은 경복궁 경회루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 주었다. 중흥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시습에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가 꿈꿔 왔던 왕도 정치의 이상을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치 체계가 일거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패도 정치의 시대에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3일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다음 읽던 책을 불사르고 똥통에 빠진 뒤 방랑길에 올랐다. ‘김시습의 재탄생’이었다.

 

중흥사를 나와 떠돌던 김시습은 강원도 철원 복계산 자락의 사곡촌으로 갔다. 지금의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이다. 세조 정권이 싫어 서울을 떠난 박계손과 그의 부친 박도 등 영해 박씨 일가 일곱 명이 은거하던 곳이다. 세조가 예조참판에 임명했으나 이를 거부한 조상치도 이곳으로 왔다. 김시습은 이들과 함께 이곳에 은거하면서 패도의 시대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훗날 이 부근에 이들 아홉 사람을 기리는 사당인 구은사가 세워졌다.

 

매월당은 1456년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나와 있다. 이긍익은 “김시습이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성승 등 다섯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고 한다”라고 썼다. 사곡촌에 머물던 김시습이 사육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한 것 같다. 1457년 10월 단종은 영월에서 목이 졸려 죽는다. 1458년 봄 24세의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로 갔다. 동학사에는 삼은각이 있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기리는 사당이다.

 

김시습은 이곳에서 단종의 제사를 지냈다. 이후 승려 차림으로 관서 유람에 나서 임진강을 건너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로, 이후 평양으로 갔다. 영변, 묘향산 등을 돌아보았다. 김시습은 1458년 가을 평양 부근의 초막에 머물면서 관서 지방을 여행하면서 지었던 시들을 묶어 <유관서록>이라고 이름지었다. 이후 양평 용문사 용문사, 여주 신륵사, 원주 동화사, 오대산 월정사, 경포대, 대관령··· 등 관동 지방을 유람한 기록을 1460년 9월 <유관동록>으로 정리했다. 호서 지역을 유람한 뒤인 1463년 가을에는 <유호남록>을 지었다. 그야말로 삼천리 방방곡곡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29세 되던 1463년 봄 그는 경주 금오산 용장사로 간다. 이곳에서 그는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 용장사에서의 느낌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용장사 경실에 거처하면서 느낌이 있어서’라는 시다.



‘용장산은 깊고 으슥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없네.

가랑비는 시냇가 대숲으로 옮아가고

살랑 부는 바람은 들판 매화를 보호하지.

작은 창 아래 사슴과 함께 잠들고

마른나무 의자에 먼지와 함께 앉았다.

어느새 처마 아래

뜨락 꽃은 졌다가 또 피네.



김시습은 금오산에 머물면서 매화의 기품과 매화를 찾아나서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들을 14수나 지었다. 김시습이 매화를 자신의 상징물로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화는 청사(淸士), 은일, 은둔의 상징이다. 그는 매화를 보면서 그 정결한 정신을 사랑하고 세간 명리를 쫓아다니지 않겠다는 뜻을 다잡았다. 지금 많이 알려져 있는 ‘매월당’은 그가 경주에 머물고 있던 시절의 당호이다. 그가 남긴 시문에 ‘매월당’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훗날 윤춘년이 쓴 ‘매월당집’에서부터 ‘매월당’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해 일반화 되었다. 매월당은 설잠이라는 법명 외에 동봉, 청한자, 오세암, 벽산, 췌세옹 등 호가 많다.

 

금오산에 머물다 1465년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했던 김시습은 이후 10년 가까이 수락산에 은거한다. 지금의 남양주시 내원암 근처이다. 김시습은 ‘폭천정사’를 짓고 스스로 노동하며 불교와 도교에 대해 공부한다. 김시습은 성종 임금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인물을 널리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갖고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대에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기대만큼 변하지 않았고 천거해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의 은거는 계속된다. 이 시절 그는 당시의 정치 구조에서 소외되어 있으면서 자유를 추구했던 유생 남효온, 종실인 이정은, 아전 출신 홍유손 등과 두루 교유했다.

 

47세 되던 1481년 봄 김시습은 돌연 머리를 기르고 환속했다. ‘···어리석고 못난 소자가 가문을 이어야 할 텐데, 이단에 깊이 빠졌다가 말로에 가까스로 뉘우쳤습니다···“라는 제문을 지어 부친과 조부의 제사를 지냈다. 이때 김시습은 안씨의 딸을 맞아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김시습은 왜 갑자기 환속해 다시 결혼을 한 것일까. 당시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그 또한 후사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간혹 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에서 보듯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결혼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번째 결혼처럼 두 번째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고 후사도 없었다.

 

김시습은 1483년, 49세 때 관동으로 2차 방랑길을 떠났다. 춘천, 강릉, 양양 등을 거치며 숱한 시를 남겼다. ‘동봉 여섯 노래’도 이때 남긴 시이다. 여섯째 노래는 그가 말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활시위 당겨 사악한 별 쏘려 했더니

옥황상제 사는 별이 하늘 가운데 있네.

긴 칼 뽑아 여우 베려 했더니

백호가 산모퉁이 지키고 섰네.

북받치는 설움 풀지 못하고

휘이 하고 휘파람 불지만 곁에 아무도 없네

씩씩한 뜻은 무너지고 괜시리 수염만 쓸어보네.’



한 번 세상에 뜻을 펼쳐보려 했으나 방해꾼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말년을 보내는 심경을 담은 시다. 김시습의 일생을 훑어보면 그는 이른바 ‘비주류’로서 살고자 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가 꿈꾸었던 왕도 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세조가 물러난 뒤 열린 새로운 세상에서 그는 한때 현실 정치에 자신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무위에 그쳤다. 그가 유교건 불교건 현실적인 측면에 주목했고 늘 노동을 중시하며 스스로 노동에 힘썼던 것도 따지고 보면 현실주의자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제3자의 위치에서 비판만 일삼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1491년 봄, 서울 중흥사에 온 김시습은 김일손, 남효온 등과 4박5일간 머물며 도봉산 북한산 등을 유람하고 다시 관동으로 갔다. 그런 뒤 무량사로 가 생을 마친다.

중종 때 이자가 <매월당집서>를 썼다. 윤춘년은 <매월당 선생전>을 패냈다. 선조 임금은 그의 문집 <매월당집>을 간행했다. 매월당집에 수록된 그의 시는 2,200여 수에 달한다. 율곡 이이가 쓴 ‘김시습전’도 이 이 안에 들어 있다. 1518년에 편찬한 <속동문선>에는 그의 시가 49제 68수나 실려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 가운데 <속동문선>에 50여 수 이상의 시가 실려 있는 사람은 서거정과 김종직 외에 김시습 뿐이다. 정조는 그를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청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지음. 돌베개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지음. 일지사

       길 위의 노래. 정길수 편역. 돌베개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지음. 문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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