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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와 김시습 - 유홍준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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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71회 작성일 23-05-0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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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와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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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를 걷다


무량사는 부여가 내세울 가장 아름다운 명찰이며, 대한의 고찰이다. 보물이 무려 6(극락전, 석탑, 석등, 괘불, 김시습 자화상, 극락전 소조아미타삼존불)개나 된다. 무량사는 초입부터 답사객의 마음을 고즈넉한 산사에 이르는 기분을 연출해 준다. 외산면 소재지에서 무량사로 접어들면 이내 은행나무 가로수가 5리 길로 뻗어 있다. 사하촌 입구에 다다르면 길 가운데 느티나무가 가로막고 그 옆으로는 나무 장승이 한쪽으로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100년은 족히 된 해묵은 것부터 요즘 것까지 대여섯 분이 함께 있는데 그 형태의 요약은 부랑쿠지의 인체조각도 못 따라올 정도로 단순미가 넘쳐흐른다. 거기다 세월의 풍우 속에서 그 표정은 더욱 깊고 그윽하다.

무량사는 무엇보다 자리앉음새가 그렇게 넉넉할 수 없다. 무량사 입구에 당도해 차에서 내리는 답사객은 이렇게 넓은 산중 분지가 있나 싶어 너나없이 앞산, 뒷산, 먼 산을 바라보면서 가벼운 탄성을 던진다. 문경 봉암사, 청도 운문사처럼 산중 분지에 사방으로 둘러친 산등성이에 열두판 연꽃 같은 편안한 절이다. 그런데 그 분지가 사뭇 넓어 시원한 맛이 있다.

산사의 ‘인프라’는 산일 수밖에 없는데 무량사 만수산은 1년 12달이 절보다 아름답다. 꽃 피는 봄철, 단풍이 불타는 가을, 눈 덮인 겨울날의 무량사야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아직 잎도 꽃도 없고 눈마저 없어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2월의 만수산은 수묵화 같은 깊은 맛이 있다. 나무에 봄물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마른 가지 끝마다 가벼운 윤기가 돌 때 산자락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마치 보드라운 천으로 뒤덮인 듯한 착각조차 일어난다. 그럴 때는 하늘에서 떨어져도 쿠션 좋은 침대에 눕는 기분으로 상처 하나 나지 않을 것 같다.

무량사는 일주문부터 색다르다. 원목을 생긴 그대로 세운 두 기둥이 아주 듬직해 보이면서 지금 우리가 검박한 절집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묵언으로 말해준다. 여기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로는 기껏해야 다리 건너 저쪽 편으로 돌아가는 짧은 길이지만 그 운치와 정겨움이 어떤 정원설계사도 해내지 못할 조선 산사의 매력적인 동선(動線)을 연출한다.

천왕문 돌계단에 다다르면 열린 공간으로 위풍도 당당하게 잘생긴 극락전 이층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왕문은 마치 극락전을 한폭의 그림으로 만드는 액틀 같다. 적당한 거리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극락전의 넉넉한 자태에는 장중한 아름다움이 넘쳐흐르지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미더움이 있다.

극락전은 무량사 건축의 핵심이며 이를 기준으로 해서 앞뒤 좌우로 부속건물과 축조물 그리고 나무가 포치(布置)해 있는데 그것들이 여간 조화롭지 않다. 법당 앞엔 오층석탑, 석탑 앞에는 석등이 천왕문까지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금을 긋는데 오른쪽으로는 해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한쪽으로 비켜 있어 인공의 건조물들이 빚어낸 차가운 기하학적인 선을 편하게 풀어준다.

극락전 왼쪽으로는 요사채와 작은 법당이 낮게 쌓아올린 축대에 올라앉아 있고, 그 앞으로는 향나무·배롱나무·다복솔 같은 정원수가 건물이 통째로 드러나는 것을 막아준다. 그래서 극락전 앞마당은 넓고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 된다. 무량사는 공간배치가 탁월해 아름다운 절집이 되었지만 사실 그 아름다움의 반 이상은 낱낱의 유물 자체가 명품이고 역사의 연륜이 있기 때문이다.


 

무량사의 역사와 유물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梵日)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하지만 문무왕은 7세기 분이고 범일국사는 9세기 스님이니 이는 말도 안 된다. 낭혜(郎慧)화상 무염(無染)이 창건했을 개연성이 더 크다. 무염은 가까이 있는 성주사를 창건한 스님이고 태조암 쪽으로 가다보면 통일신라시대 절터가 있다. 여기가 원래 무량사 자리로 거기에 서면 만수산 산자락 품이 더 넓고 편안하다.

그런 무량사가 불에 타 고려 고종(1213-59) 때 중창됐다고 한다. 아마도 원나라 침공 때 불에 탄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불탄 자리를 버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긴 듯하다. 그것은 오층석탑(보물 제185호)과 석등(보물 제233호)이 말해준다.

오층석탑은 한눈에 정림사터 탑을 빼닮았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늘씬한 것이 아니라 매우 장중하다는 느낌을 더한다. 적당한 체감률로 불안하지 않은 상승감을 갖추고 있고 완만한 기울기의 지붕돌은 처마 끝을 살짝 반전시켜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이 있다. 지붕돌 아랫면에는 빗물이 탑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홈을 파놓은 절수구(切水溝)가 있다. 옛사람들은 멋뿐 아니라 기능에도 그렇게 충실했다는 징표다.

석등은 얼핏 보면 탑에 비해 작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게 작아서 오히려 공간배치에 걸맞은 면도 있다. 무량사에 오면 나는 항시 느티나무 아래 큰 돌 위에 걸터앉아 거기에서 석등과 석탑 너머 있는 극락전과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작은 당우들, 산신각으로 빠지는 오솔길을 바라보곤 한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작은 석등이 더욱 알맞은 크기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극락전(보물 제356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렇게 너그럽고 준수하게 잘 생길 수가 없다. 사실 절집에서 목조건물 자체가 잘 생겼다는 감동을 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 극락전만은 따질 것도 살필 것도 없이 예스러운 기품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기쁘게 열린다. 특히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바라보면 그윽한 맛이 가득 다가오는데 바로 그 자리에는 부여군에서 세운 ‘사진 잘 나오는 곳’이라는 포토 포인트가 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느티나무 가지를 위로 물고 인물은 뒤로 물러선 다음 극락전 석등 석탑이 모두 나오게 찍으세요’라며 구도까지 잡아주고 있어 사람마다 웃으면서 그대로 따라해 준다.


 

진묵대사의 시

임진왜란 때 무량사는 병화를 입었다. 이것을 인조 때 진묵대사(震默大師, 1563∼1633)가 중창했다고 한다. 무량사 극락전은 그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안에 있는 소조아미타삼존불(보물 제1565호)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에는 1633년에 만들었다고 분명히 적혀 있고, 따로 보관된 괘불(掛佛: 보물 제1265호)에는 1627년에 그렸다는 기년과 함께 혜윤·인학·희상이라는 화승들의 이름도 적혀 있으니 무량사는 이때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진묵대사가 이 모든 불사를 다 감당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무량사 선방인 우화궁(雨花宮) 건물 주련에는 진묵대사의 시 한수가 걸려 있다. 우화궁은 집보다 현판 글씨와 액틀도 정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는 이 마다 감탄하며 사진에 담아간다. 우화(雨花)는 꽃비라고 풀이한다. 불교에서 전하기를 석가모니가 영산회(靈山會)에서 설법할 때 천상에서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만다라꽃이 비 오듯 내리고 천녀가 주악을 연주하며 공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화궁은 설법을 하는 곳이다. 완주 화암사와 장성 백양사에는 우화루라는 건물이 있어 법회가 열린다. 이 우화궁에는 기둥마다 달려 있는 주련 중에 진묵대사의 시는 그 시적 이미지가 모르긴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스케일이 클 것이다.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산은 베개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독

크게 취해 거연히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장삼자락이 곤륜산(히말라야)에 걸릴까 걱정이 되네

天衾地褥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遽然仍起舞 却嫌長袖掛崑崙

 

답사객들에게 이 시를 번역해주면 꼭 한 번 더 풀이해달라고 한다. 유영구 KBO 총재팀과 무량사에 왔을 때도 나는 앙꼬르를 받아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산은 베개……” 하고 첫 번째 구를 낭송하는데 유영구 총재가 여지없이 유머 넘치는 코멘트 한마디를 던졌다. “꼭 노숙자의 노래 같다.”


 

김시습 영정과 청한당

우화궁을 지나 절 안쪽으로 들어가면 노목 사이로 저 멀리 작은 당우 두 채가 보인다. 개울 건너 양지 바른쪽에 조촐히 앉아 있는 두 건물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답사객들은 마치 예쁜 여인 보면 쫒아가듯 발길을 그쪽으로 옮긴다. 하나는 산신각이고 또 하나는 ‘청한당(淸閒堂)’이라는 선방 겸 손님방이다. 청한당은 몇 해 전에 지은 새집이지만 아주 예쁜 세칸짜리 집으로 제법 고풍이 있고 돌축대 위에 산뜻이 올라앉은 자태가 정겨워 툇마루에 한번 앉아보고 싶게 한다.

청한당 툇마루에 앉아 고개를 들어 현판을 보면 한(閒)자를 뒤집어 써놓아 좀처럼 읽기 힘들다. 김시습의 호가 본래 청한자(淸寒子)인 것을 슬쩍 바꾸어놓고 또 글자를 뒤집어써서 한가한 경지를 넘어 드러누운 형상으로 쓴 것이니 서예가의 유머가 넘쳐난다. 이 현판의 내력을 얘기해 달라고 하면 자연히 나는 답사객들을 툇마루와 돌축대에 편안히 앉게 하고 내가 알고 있는 김시습 얘기로 들어가게 된다.

“천년의 연륜을 갖고 있는 고찰에는 반듯이 그 절집의 간판스타가 있기 마련인데 무량사의 주인공은 단연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입니다. 저 앞쪽 우화궁 위로 보이는 건물이 김시습의 영정(보물 제1497호)을 모신 영산전입니다. 생육신의 한분인 김시습은 방랑 끝에 말년을 여기서 보내고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습니다. 절집 밖으로 나가서 주차장 아래편 비구니 수도처인 무진암(無盡菴)으로 가는 길목의 승탑밭에는 김시습의 사리탑이 있습니다. 이 사리탑에는 ‘오세(五歲) 김시습’이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왜 오세라고 했는지 아는 분 계세요?”

대개는 모른다. 김시습이 생육신의 한 분이고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저자라는 사실은 학생 시절에 배우고 시험 문제에도 잘 나오는 것이어서 알고 있지만 그의 일대기나 인간상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일이 없다. 그것이 우리 교육의 맹점이다. 서양에서는 여행책과 전기(傳記)가 출판의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데 우리나라에선 바이오그래피의 전통이 아주 약하다.

김시습의 일대기는 율곡 이이가 선조대왕의 명을 받아 쓴 <김시습전>이 있고, 이문구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과 심경호 고려대 교수의 『김시습 평전』이라는 명저가 있어 찾아서 읽으면 알 수 있지만 그런 독서 분위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우리 인문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원인의 하나이다.

 


 

김시습의 일생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본관은 강릉이다. 세종 17년(1435)에 태어난 그는 놀라운 천재로 세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이 얘기를 듣고 승지(비서)에게 과연 신동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승지는 다섯살 김시습을 무릎에 앉히고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에 시습은 이렇게 지었다.

“올 때는 강보에 싸인 김시습이지요(來時襁褓 金時習).”

세종대왕은 이 보고를 듣고 직접 보고 싶으나 군주가 어린아이를 직접 시험한 예가 없다며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정성껏 키우라. 성장한 뒤 크게 쓰리라”라며 비단도포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오세(五歲)라는 별호를 얻었다.

21살 때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양위한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방성통곡을 한 다음 책을 불사르고 광기를 일으켜 뒷간에 빠지기도 했다. 22살 때 사육신이 마침내 처형되자 김시습은 성삼문, 유응부 등의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어주고 작은 돌로 묘표를 삼았다. 그리고 24살부터 중이 되어 방랑을 시작해 관서지방·관동지방·호서지방을 두루 유람하고 31살엔 경주 남산(금오산) 용장사에 서실(書室)을 짓고 정착했다. 이때 『금오신화』를 지었다. 승명은 설잠(雪岑)이었다. 그리고 효령대군의 청을 받아 서울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해 찬시를 짓고 돌아간 일도 있다.

세조가 죽자 그는 경주를 떠났다. 성종 3년(1472), 38세의 김시습은 도봉산·수락산의 절로 와서 40대 전반까지를 보내며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를 짓고 유교와 불교의 참뜻을 강구했다. 그러다 47세 때는 아예 환속해서 장가도 들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1년도 못돼 아내와 사별하고 이번엔 ‘폐비윤씨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세상을 버리고 스님 모습으로 관동지방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그리고 58세에 무량사로 들어와 이듬해에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청한자(淸寒子), ‘세상의 쓸모없는 늙은이’라는 뜻의 췌세옹(贅世翁) 등이 있다.

 


김시습에 대한 후대의 평

율곡은 ‘김시습은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며 대범하고 솔직하였다.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고 세태에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여 세상과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불가에 의탁하고 방랑을 일삼았다’라고 했다. 당대의 명신이고 문장가인 서거정은 김시습을 국사(國士)라 칭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서거정이 막 조정에 들어가는데 김시습이 남루한 옷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른 채로 길을 막고는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이 편안한가” 하였다.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수레를 멈추어 이야기하니, 길 가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어떤 이가 그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하자 서거정은 머리를 저으며, “그만두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이 사람을 벌하면 백대(百代) 후에 반드시 그대의 이름에 누(累)가 될 걸세” 라고 하였단다.

이처럼 김시습의 일생을 보면 비록 그가 시와 문장과 유·불·선의 사상을 차원 높게 피력했지만 세상에 쓰임을 받지 못했고,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일에 마음 상한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해 방외로 방랑하게 되었으니 결국 옳은 가르침을 저버리고 호탕하게 제멋대로 놀아난 셈이다.

율곡도 김시습은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 스스로 수습할 수 없었던 것 아니면 그의 기상이 맑기는 해도 무게가 모자랐던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며 애석한 것은 그의 영특한 자질로써 학문과 실천을 갈고 쌓았더라면, 그가 이룬 것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라고 했다.

그러나 율곡은 김시습의 인간적 가치와 위대함을 이렇게 평하는 것으로 글을 맺었다. “그러나 김시습은 절의를 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이는 나약한 사람도 움직이게 되니 백세의 스승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김시습이 귀하고 위대한 것은 그의 삶 자체에 있는 것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존숭받는 ‘백세의 스승’이 되고 있는 것이다.

 


※ 위 내용은 유교수가 <창작과 비평>에 썼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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