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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의 대명사, 매월당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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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08회 작성일 23-05-08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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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이 아끼던 천재

어느 시대이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뜻을 바로 세워 그 시대를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주변 환경과 자신과 뜻이 맞지 않을 때 여러가지 형태로 반응을 하게 되는데, 매월당 김시습을 통하여 이런 상황에서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인간적 면모가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다. 20대에는 광인적인 행동을 하며 전국 유람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고, 30대에는 금오신화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우리 문학사에 금자탑을 쌓았으며, 40대에는 중앙정계와 지방의 선비들과 시를 통한 끊임없는 비판을 통하여 시대를 통찰하고, 50대에는 자신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행동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후학들에게 전수해준 훌륭한 인물이다. 특히 단종복위운동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그러한 살벌한 상황에서 사육신의 시신을 모아 노량진 언덕에 장사지내고 계룡산 동학사에 그들의 혼을 위로하는 모습에서 우리 후세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아이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이웃에 살고 있던 최치운(崔致雲)이라는 학자가 아기인 김시습에게 문장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 버렸다 한다. 그는 세살이 되자 어려운 한문책을 줄줄 읽었을 뿐 아니라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당시의 재상 허조(許稠, 1369~1439)는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김시습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험을 해 보았다. “너는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老’자를 넣어 시 한수 지어 보아라.” 허조의 이 말이 끝나자 마자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보였다. ‘老木開花心不老’ 즉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는뜻이다. “이 얼마나 천재적인 표현인가! 너는 과연 신동이로다.” 허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느덧 궁중에까지 들어가자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은 김시습을 궁중으로 데려와 관리들을 시켜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았다. 시험관의 무릎 위에 앉은 김시습은 즉석에서 자유자재로 시 몇 수를 지어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세종은 매우 감동하여 비단 50필을 하사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로부터 그가 천재라는 소문이 송도에 울려 퍼지게 되었으며, ‘오세문장五歲文章’이라는 칭호를 받아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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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회오리 속의 번민, 그리고 절개

그는 18세가 되던 해 혼인을 하였으나 원만하지 않았고, 집을 떠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계유정란이 일어난 1455년, 당시 21세였던 김시습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추방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릴 때 세종과의 약속을 삶의 큰 지주로 삼아 언젠가 세종의 손자인 단종 밑에서 큰일을 하리라는 꿈을 품고 있었던 그인지라, 그 소식은 청년 김시습에게 너무나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사흘 밤낮을 방안에 틀어박혀 고민하며 통곡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공부하기 위해 가져온 책과 지필묵 등을 모두 깨끗이 태워 버렸을 뿐 아니라 가위로 손수 머리털을 자르고 홀연히 절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일개 초라한 승려로 방랑생활을 계속 하였다.

그러던 1456년 6월에 세조의 암살 모의에 대한 단서가 새어나가 성삼문 등이 극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김시습은 처형되어 거리에 버려진 사육신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노량진에 매장하고, 몰래 동학사로 와서 삼은각 옆에 사육신단을 세우고 제를 지냈다. 이듬해인 1457년(세조3),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던 단종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에 김시습을 비롯해 조상치, 조려, 성희, 송간, 이축, 정지산 등은 동학사에 모여 사육신단 위에 품자형品字形의 단 하나를 더 만들어 단종의 어포(御袍)를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이때 김시습은 ‘상왕초혼사上王招魂辭’라는 축문을 짓고 통곡하였다.

이후 방랑길에 나선 김시습은 1458년 송도를 비롯한 평양일대를 계속 유람하며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이 책의 내용은 향토적인 풍물성을 띠고 있으나, 실은 그 속에 당시 통치계급들의 부패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다. 1460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썼고, 또 호남지방을 돌며 1463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썼다. 이렇게 장장 8년에 걸친 전국여행을 통해 그는 백성들의 생활실상을 알게 된 동시에 구석구석에 만연한 권력층의 부패를 샅샅이 보게 되었다. 1464년 30세가 된 김시습은 주거지를 강원도에서 신라고도인 경주 근처에 있는 금오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5년 3월, 효령대군의 추천을 받아 서울로 갔으나 권력사회 속에서 양심을 굽히며 살 수 없다는 깨달음에 따라 다시 금오산의 사당으로 돌아와 권력에 저항하며 살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는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와 『유금오록遊金鰲錄』이라는 저항시를 썼다.

세월은 변하여 1468년 세조가 죽고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고, 세조 장남의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김시습에게 상경할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1471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유일한 마음의 친구였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달성군達成君’의 칭호를 받는 대귀족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일관된 저항정신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1472년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 쓰기를 계속했다. 그는 언젠가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보았던 세조의 수족인 한명회의 시를 인용해 자신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시를 짓기도 했다. 즉 ‘靑春扶社稷白首臥江湖(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라는 한명회의 시에서 ‘扶’자 대신 ‘亡’자를, ‘臥’자 대신 ‘汚’자를 넣어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것만 보더라도 김시습의 증오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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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저항정신 지킨 고고한 넋

승려가 되어 오랜 세월 각지를 유랑하며 불교적 내용을 담은 여러 시를 지었던 김시습은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1478년, 환속할 것을 결심한다. 이후 그는 유교의 법도에 따라 제사를 지냈을 뿐 아니라 새로 부인을 맞이하여 가정을 꾸미기도 했다. 그던 그에게 또 심기 일변할 사건이 생긴다. 갑작스런 부인의 죽음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그가 서울을 떠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것이다. 그때가 1483년, 그의 나이 49세였다. 하지만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니던 중 건강의 한계를 느낀 그는 충청도 홍산(부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라는 누추한 절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 절에서 1493년 2월에 5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김시습은 열반에 들때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땅 속에 3년 동안 묻어둬라. 그 후에 정식으로 화장해 다오.”라고 했다. 스님들은 그가 원한 대로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무덤을 열었다. 관을 뜯고 보니 김시습의 시신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핏기가 감돌았다. 스님들은 모두들 그가 성불成佛했다고 확신했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지 7년 후의 일이다. 놀랍게도 제자 윤군평이 스승 김시습을 개성에서 만났다. “아니 스승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선화仙化하신지 벌써 7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윤군평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스승에게 여쭸더니, 김시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오고 감이 자유자재다. 요새는 서경덕에게 도道를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 왕래한지 벌써 2년째가 된다.” 이 이야기는 이율곡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 기록되어 있다.

김시습은 일찍이 높은 명예를 얻었으나, 정통성을 가진 왕을 받들어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유교의 근본이라 여겨 이러한 유학의 윤리를 벗어난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울분과 애민愛民을 위한 정치를 이루고자했던 의지의 좌절에 분노와 슬픔을 삭이지 못하여 하루아침에 속세에 발길을 끊고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숨어 살았다. 이는 속세에 살면서 인륜을 어지럽힘은 수치스러운 행위이고, 도를 행할수 없는 어긋난 세태世態에 어울리지 않음이 옳은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글. 김승기 ((사)매월당문학사상연구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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