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신동(五歲神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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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선생의 생애와 업적

오세신동(五歲神童)

  • 시습의 본관은 강릉이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 서울 성균관 북쪽 반궁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일성(一省), 모친은 울진 장씨였다. 부모가 언제 나고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김시습은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인 '명주군왕' 김주원의 22대손이다. 신라와 고려 때 명신과 석학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러나 김시습의 조부와 부친은 하급 무반직에 머물렀다. 그나마 조부는 오위부장(오늘날로 치면 연대장 정도의 직위)을 지냈으나 아버지 일성은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음보(蔭補)를 통해 충순위(5위 가운데 충무위에 딸렸던 군대)의 하급직에 봉해졌을 뿐이다.
  • 시습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공자가 환생한 인물'이라고까지 불렸다.
    "매월당이 날 때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가 반궁리 김일성의 집에서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그 집에 가서 물어보니 매월당이 태어났다고 하였다"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 '시습'은 논어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이다.
  • 웃에 살던 학자 최치운이 지어주었다. 최치운은 세종 때 집현전에 들어갔고 다섯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이조참판과 좌승지를 역임했다.
    그러나 5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시습은 여섯 살이었다. 만약 최치운이 더 오래 살면서 관직에 머물렀다면 김시습의 앞날에 힘이 되어 주었을 지 모를 일이다.
  • 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다. 그가 쓴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서 스스로 그렇게 썼다.
    그의 천재성에 주목한 외할아버지는 김시습에게 우리말보다도 '천자문'을 먼저 가르쳤다.
    (당현송현시초(唐賢宋賢詩抄)에서 100여 수를 가려 뽑아 읽게 했다.
    김시습은 50세 무렵에 지은 시 '동봉 여섯 노래'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이렇게 썼다.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갓난아기 아끼시어
    내 옹알이 소리 듣고 기뻐하셨네.
    걸음마 배우고 나니 글공부 가르치셔
    내가 지은 시편들이 꽤나 고왔지.
    세종대왕 들으시고 궁궐로 부르사
    큰 붓 한 번 휘두르니 용이 날아올랐다네.'



    김시습은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 유모인 개화가 보리를 맷돌에 갈고 있는 것을 보고 지은 시가 전한다.

    '비도 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지.(無雨雷聲 何處動)
    누런 구름이 풀풀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 四方分)'

  • 의 소문을 듣고 다섯 살 때 정승 허조가 찾아왔다. 허조는 김시습을 만나자마자 "늙을 노(老)자로 시구를 지어 보거라"라고 말했다.
    김시습은

    노목개화심불로
    (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

    라고 읊었다.

    세종대왕이 승정원 승지 박이창을 시켜 김시습을 시험하고 칭찬하면서 비단을 내린 것은 아홉 살 전후한 시기이다.
    박이창이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구나(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라고 읊으니 김시습은 이렇게 답했다.

    '성주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번득이는 듯하네
    (聖主之德黃龍飜碧海之中)'

  • 이창이 세종을 뵙고 이를 아뢰자 세종대왕은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내가 친히 불러 만나보고 싶지만 관례에 없던 일이어서
    사람들이 듣고 놀랄까봐 두렵다.
    집으로 돌려보내어 그 아이의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지극히 정성스레 가르쳐서 키우도록 하라.
    성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뒤에 크게 쓰고자 하노라."

  • 춘년이 쓴 <매월당 전집>에는 이때 임금이 비단 50필을 상으로 하사했다고 했다.
    "많은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나 시험해보고자 함이었는데 각 끄트머리를 묶어 어렵지 않게 끌고 갔다고 한다.
    어린 그가 비단을 끌며 궁궐문을 나섰을 때 구경꾼으로 길에 사람이 가득하였고
    어떤 노파는 하도 기특해서 두부를 입에 넣어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 섯 살 때부터 열세 살에 이르기까지 김시습은 이웃에 살던 대사성 김반으로부터
    <논어> <맹자> <시경> <춘추> 등을 배웠다.
    김반은 당시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권근의 제자로 경서에 통달해 사람들이 김구, 김말과 함께 '경학 3김'으로 부르던 인물이었다.
    겸사성 윤반으로부터는 <주역> <예기> 등을 배웠다. 윤상은 향리 출신으로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합격한 인물로 야은 길재의 제자이자 점필재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에게 역경을 가르친 당대의 일류 학자였다.
    이 시기에 김시습은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 각종 역사서와 제자백가서 등을 스스로 공부했다.
  • 시습이 열다섯 살 되던 해인 1449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듬해에는 그를 아껴주던 세종대왕이 승하했다.
    외할머니는 그를 강릉 부근 시골로 데려가 3년 시묘살이를 시킨다. 하지만 시묘살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어머니, 세종대왕, 외할머니가 3년 사이에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일은 김시습의 일생에 커다란 아픔을 주며 그가 인생사를 고뇌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시습의 아버지 김일성은 몸이 약해 집안일을 꾸려나가기 위해 후처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계모는 김시습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김시습은 "부친이 계모를 얻으셔서 세상사가 어그러지고 각박해졌다"라고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 썼다.
    그가 지은 시문에 '아버지'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김시습은 아버지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 가 불교를 접한 데는 이러한 가정사와 그로 인한 심적 고통이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18세 때 전남 송광사로 가 당대의 고승인 설준 대사를 만나 불법을 배운다. 송광사에 머물다 서울로 돌아온 김시습은 정3품 벼슬인 훈련원 도정이었던 남효례의 딸을 맞아 첫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부부 생활이 오래 갔던 것 같지는 않다.
    언제 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부인 남씨에 대한 이야기는 김시습이 남긴 시문 어디에도 없다. 이후 행적을 보아도 그가 부인 남씨와 같이했던 기간은 1년이 채 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후사도 없었다.
  • 7세로 왕위에 오른 문종이 병약하여 2년 4개월 만에 승하하고 1452년 5월18일 12세의 단종이 즉위했다.
    1453년 봄에 과거가 있었는데 19세였던 김시습은 낙방한다. 수험생들이 도별로 각자 거주하는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예조가 주관해 중앙에서 치르는 복시에서 낙방한 것이다. '천재'로 세상에 알려졌던 그가 과거에 떨어진 것은 그로서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등의 연이은 죽음과 그가 한때 불교에 관심을 보였던 것, 병법이나 검술 등에도 관심을 갖는 등 '젊은 날의 방황'과 과거 낙방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 시습은 이후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서책을 싸들고 삼각산(북한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그 해 10월10일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등을 강화도 교동에 유배 보낸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1455년 6월 수양대군의 위협을 견디다 못한 단종은 경복궁 경회루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주었다. 중흥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시습에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가 꿈꿔 왔던 왕도 정치의 이상을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순리에 따른 왕도의 시대가 가고 힘에 의한 패도의 시대가 왔다고 느낀 것이다. 가치 체계가 일거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김시습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공부하던 중흥사 방의 문을 걸어 잠근 뒤 3일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다음 읽던 책을 불사르고 똥통에 빠진 뒤 전국을 떠도는 탕유(宕遊・호탕한 유람)에 나섰다. '김시습의 재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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